상실의 시대


소설책은 베르나르 베르나르의 소설 이후로 처음 읽은것 같다.

그 말인즉 정말 미친듯이 오랜만이라는 뜻이다. (베르나르의 소설들도 다시 읽고싶다. 아직까지도 기억나는 장면들이 너무 많다. 영화화안되나?)

예전에는 소설의 매력을 잘 알지 못했다.

나의 책장에는 대부분이 자기계발서였고, 어느시점이 되고나서는 그것들마저 거추장스러워 거의 모든 책을 처분하였다.

이사를 워낙 많이 다니고 환경적인 이유, 공간의 제약을 이유로 ebook을 선호하게 되었는데,

한 무더기로 ebook을 사고나니 요즘은 다시 종이책이 읽고싶은 요즘은 내가 아주 대단한 청개구리 심보를 갖고있다는걸 다시금 느끼게 해준다…책의 촉감이 주는, 한장한장 넘기는 그 맛!

책의 내용에 대해 말하기 전에 이렇게 주저리주저리 말하는 이유는 소설이 원래 이렇게 매력있는것이었나, 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렇다.

그리고 이렇게 오랜만에 집중해서 책을 읽은것도 퍽이나 오랜만이라 신기하기도 한 마음에 이렇게 주절주절 써내려가고있다.

예전에는 인풋도 너무 없던시절이라 인풋이 중요했겠지만 요즘은 인풋이 너무 많은 시대라 인풋과 아웃풋이 같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번에 읽게 된 소설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였다.

책은 안읽어봤어도 이름은 들어봤을 이 작가의 책을 난생 처음으로 읽어봤다.

1Q84, 해변의 카프카, 상실의 시대로 유명한 하루키작가의 책을 이제서야 읽어보았다.

원제는 ‘‘상실의 시대’‘가 아닌 ‘‘노르웨이 숲’‘이었지만 한국에서 매출이 적어 제목을 바꿨더니 매출이 늘어서 ‘상실의 시대’로 더욱 잘 알려져 있다.

일본에서는 이 책의 출판이후 하루키신드롬이라는 현상이 일어날만큼 엄청난 인기를 끌었더랬다.

책의 줄거리는 워낙 많은곳에 설명이 되어있기 때문에 그걸 적고싶지는 않고

책을 읽는 중간중간의 나의 느낌에 대해서 적어놓는다.

이 책을 읽으면서 유난히 많이 들었던 생각은 2가지였다.

  1. 나라면 어땠을까
  2. forever young

우선 이것과는 별개로 상실의 시대에 나오는 문장들이 굉장히 노골적이고 외설적이라 혹자는 야설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들었다.

물론, 외설적인 장면들이 많이 나오기는 한다.

그치만 그런 장면들을 묘사하기 위해서 쓴 글이 아니라,

어떠한 상황과 주인공들이 느끼는 감정들을 극대화하기 위한 필요에 의해서 쓴 묘사쯤으로 생각되었다.

나는 가끔, 창작자가 무슨 얘기를 하고 싶어했는지 보기보다는

자극적인 타이틀에만 꽃혀 주제를 왜곡시키는 사람들을 보면서 안타깝다는 생각이 든다.

색,계만 해도 그렇다. 나는 색계를 굉장히 감명깊게 봤고 중국어공부를 하고싶다는 마음이 들게한 첫 영화였다.

그런데 사람들이 주로 얘기하는 것은 색계의 정사씬이었다.

물론 모든 정사씬이 그렇듯이 자극적이기는 하다.

하지만 내가 느낀 색계의 정사씬은 주인공간의 관계를 그리기 위한 하나의 표현 수단이라는 생각이었다.

상실의 시대를 읽으면서 나는 색,계가 떠올랐다(색,계 조만간 다시 봐야겠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모든 소설들이 그럴것이고 모든 책읽는 즐거움을 아는 사람들은 이미 알고 있겠지만,

나는 이렇게 ‘내가 주인공이라면 어떘을까’라는 생각을 하며 읽은것은 처음이었다.

내가 와타나베였다면, 내가 나오코였다면, 내가 미도리였다면, 내가 레이코여사였다면..

어땠을까

그리고 하루키작가는 왜 이런 소설을 썼을까.

어떤것이 그에게 이러한 주제에 대해서 영감을 줬을까.

그도 이런 상실을 겪었나?

그리고 여태까지 겪었던 상실에 대해서 생각해봤다.

…없었다.

나는 상실이라는걸 여태 경험해본적 없다.

내가 소중하다고 여기는, 가깝다고 느끼는것을 잃어본 경험이 없다.

책에 보면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슬픔을 계속 겪는다고 해서 그 슬픔에 무뎌지지 않는다고 했다.

매번 찾아오는 슬픔은 매번 새롭고, 매번 슬프며, 매번 처음부터 다시 감당해야한다는 식의 문장이었는데

그 문장이 기억에 꽃힌걸 보면 꽤나 내 입장에서 기억에 남는 문장이었나보다.

두번쨰는 forever young.

사실 이건 아이유의 eight을 골백번 듣고나서 더더욱 많이 든 생각이었다.

아이유의 eight뮤비에 나오는 2개의 대상이 종현과 설리라는 해석이 있다고 했다.

그리고 계속해서 반복되는 forever young이라는 가사.

왜 평생 어리다는 말을 계속하는걸까, 왜 이런 가사를 썼을까. 궁금했었다

그러다 이 소설을 읽고 어렴풋이나마 그 가사에 대해 해석을 할 수 있었던것 같다.

기즈키는 17살에 생을 마감했고, 나오코는 20살에 생을 마감했다.

주인공 와타나베는 이 둘에게 ‘그들은 영원히 17살,20살에 머물러 있을것이다’ 라는 말을 한다.

그들은 누군가의 기억에서는 평생 어린모습으로 기억될것이다.

그게 그들을 기억하는 와타나베의 마지막 기억일테니 말이다.

사실 정확하지는 않지만 이런 마음으로 가사를 쓰지 않았을까?

만약 이 곡이 정말 종현과 설리를 기억하기 위한 곡이라면, 슬픈 일이지만 그들은 영원히 젊은 채로 기억될테니 말이다.

하루키의 다른 소설들도 읽어보고싶고, 일본에서 나온 상실의 시대 영화도 보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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